2009년 11월 4일

나 스물 한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싱글이었던 나.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대학동이가 굳이 부탁을 하지 않는 나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당시의 난 남자친구의 필요성을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므로 꽤 여러 번 거절했것만 그 친구는 내켜하지 않는 나를 얼르고 달래어 소개팅 날짜를 잡아주었다. 아! 그 친구 남자였다.

소개팅 장소는 대학로. 늦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은 오후 1시 30분.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게 해야 해" 이런 말 조차 들어보지 않았던 선머슴같았던 나 소개팅 장소에 30분 일찍 나갔다. 그 때 난 두건에 약간 미쳐있었다. 당시를 기억해보면 부모님이 함께 있지 않은 나는 항상 두건을 쓰고 있다. 그 소개팅 날도 나름은 멋을 내겠다는 것이었는지 검은색 두건에, 검은색 긴팔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내가 아끼던 형형색색으로 된 5센치 정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나는 지금도 간간히 나의 취미인 뜨개질을 하면서 베스킨라빈스 앞에 있는 큰 나무 밑 벤치에 앉아있었다. 뜨개질에 몰두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1시 40분. 주선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던 것 같다. 10분쯤 흘렀을까, 주선자인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소개팅남이 일이 생겨 조금 늦는다고 미안하지만 기다려 달라고. 날이 생각보다 더워 짜증이 났었지만 동기의 얼굴을 봐서 참고 기다렸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1시 30분 이었지만 시계는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저 멀리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한 남자. 아~ 난 멀리서 양파가 공중에 떠 있는 줄 알았다. 흡사 '이나중탁구부'의 다케다나 '마루코는 아홉살'의 노마 자식같이 생긴 양파가 저 멀리서 걸어오며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턱 막혔다. 외모가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료품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것 아닌 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동기의 얼굴을 봐서 참았다. 40분이나 늦은 사람에게 화도 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학교 선배였다. 깎듯하게 인사를 하고 늦을 수도 있다라는 말과 베시시한 미소를 지었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나 난 정말 배가 고팠고, 소개팅의 당연한 순서인 식사로 이어질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 "축구하다가 밥 먹고 와서 배가 안 고프네, 너는 뭘 먹어야 하겠니?" 이 사람 내가 정말 마음에 안 드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너무 비굴하게, "저는 배가 좀 고파서요. 저 간단하게라도 무엇이든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계산은 제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니, 내가 맛있는 곳 알고 있는데 거기 데려갈게. 내가 사줘야지 늦었으니."라고 한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했다. 그리고 데려간 곳, 2500원짜리 왕돈까스를 파는 집. 나 정말 2500원짜리 돈까스 먹고 싶지 않았다. 그 잘 먹는 내가 돈까스를 남겼다. 남겼다... 정녕 먹고 싶지 않았다. 먹고 나서도 내가 계산하겠다고 했다. 바로 집에 갈 요량으로. 그러나 그는 무슨 큰 인심을 쓴다는 듯이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냥 그러게 뒀다.

그러던 그 양파남, 마로니에 공원쪽으로 걷자고 했다. 정말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학교 선배에다 동기의 주선,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릿 속에서 맴돌아, 그냥 자포자기 심정으로 양파남을 따라 걸었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던 중 길거리 공연이 있었다. 두 남자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을 웃기는, 흡사 만담같은 것. 그런데로 재밌어 한참을 보다가, 왠지 기분이 풀려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내 얼굴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양파남이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서 재미있는 것을 하자고 했다. 뭐가 재미있는 것일까 약간 궁금해하며 따라 갔더니 이번엔 배드민턴을 치잔다. 아무리 여름이 끝날 무렵이라고 해도 더웠고, 두건을 쓰고 있었고, 힐을 신고 있었던 나에게... 아~ 뜨악했다. 그런데 그냥 쳤다. 약 한 시간 가량을 공원 한 가운데서 배드민턴을 쳤다. 그것도 꽤 열심히. 사실 악으로 쳤다. 열심히 치고 피곤하다고 말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배드민턴을 치고 꽤 더워졌는지 양파남이 그늘에서 쉬자고 했다.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았다. 양파남, 말을 시작했다. 자신의 취미는 시를 짓는 것이라고. 좋아하는 시도 많다고. 그러면서 김춘수의 "꽃"을 마로니에 공원 한 복판에서 큰 소리로 나에게 읊어주었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공포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봤다. 양파남이 아닌 모든 이가 나를 쳐다봤다. 애처로운 눈길로. 너 왜 거기에 그러고 앉아있느냐는 힐난의 눈길도 있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냥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라도 보이지 말자는 심정으로.

더 이상은 힘들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만 들어가봐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양파남 자기는 소개팅 나와서 그냥 들어가는 나같은 여자 예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노골적으로 뭐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인사동을 가자고 한다. 아 정말 이쯤에는 살의가 생기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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