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

"나는 열 가지 중 한 가지만 좋아도 아홉 가지 고통을 괘념치 않고 한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즐긴다. 고통에 대해 괘념치 않으면 최소한 감정적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삶을 점점 건조하게 만들어 가는 것. 건조하면 적어도 자멸하지는 않으니까."

"아무리 건조해도 아픔은 생기는 법인가. 겨울이 끝날 무렵 나를 흔들면 굳어버린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병처럼 딸각딸각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가방을 버리러 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다섯번째 질서와 여섯번째 질서 사이에

"울면서 살 지경이면 콱 죽어버려. 옛날엔 여자의 눈물이 무기였던 때도 있었지. 여자가 울면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요즘은 눈물이 똥보다 못해. 조롱거리라고. 아무도 우는 여자를 바로 안 본다니까. 배를 갈라 창자를 내놓았으면 내놓았지 눈물은 흘릴 게 못돼. 독한 세상이라고. 아무도 울면서 안 살아."

"내성적인 그들은 반가움을 억누르며 예의바르게 격식을 갖추어 서로를 가만가만 건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수줍음을 타는 사람들 특유의 그늘진 열정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오면 더이상 지체하기 어렵다는 듯 와락 달려들어 묘기를 부리는 한 쌍의 돌고래처럼 즉흥적으로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곡예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졸음이 와. 다시는 보지 말자. 난 네가 지루해. 그 말을하자 생이 정지하는 것 같았어. 유경은 일어서더니 나갔어. 난 그의 다리만 보았어. 유경은 구두를 신으려다가 멈추어 섰어. 그리고 몸을 돌렸지. 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어. 하지만 그가 현관에서 발을 들어올리고 다시 내 앞으로 와 섰을 때, 난 그를 와락 끌어안았지. 마침내 살이 갈라져 내가 둘로 나누어지는 것 같았어. 내 몸에 이렇게 넓은 틈이 있었던가. 나는 나를 수습하듯 그의 등과 목과 머리를 꽉 쓸어안았어. 따스함 부피감 단단함... 우린 사랑을 나누었어. 상상해봐, 상상이 되니... 처음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런 생각이 나를 방문해. 아침에 깨어날 때나 잠들어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중얼거려. 이렇게 생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유경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 같은 거야. 내 삶은 유경을 지나가고 싶어해."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아무것도 지키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도 상실해버린 채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먼지 가득한 잠을 자온 여자."

"욕망은 짙은 화장을 하게 하고 범람하는 강처럼 위험한 교태를 떨게 하고 꽃이 피어나듯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감각의 추억을 몸 속에 남기고 그리고 회오리바람처럼 자신이 모를 곳으로 휩쓸어가버립니다."

"삶의 얼굴을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삶이 얼마나 사소하고 굴욕적이고 고요한 것인지도 모를 거에요."

" 어쩌다가 류를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사랑하는 류... 뱀 같은 허공의 길을 걸어 너에게로 가고 싶어."

첫사랑

"첫사랑이 생애에 유일한 사랑인 사람들. 그런 확신이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자신을 사로잡을 때, 명료하지도 않고 약속도 없는 하나의 이미지가 존재의 결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의 정거장

"안심할 수 없기에, 빛나지 않기에, 요구할 수 없기에 더욱 다정해야 하는 나지막한 삶이 그곳에는 있었다. 저항이 없기에 더 섬세해지고, 헛된 희망이 없기에 시간과 공간에 대해 순응적이고 태평스러운, 마치 변화가 봉쇄된 과거로 돌아간 듯한 유순한 삶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줄 몰랐어요. 당신 손을 잡고 당신 눈길을 따라가느라,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진 줄도 몰랐어요. 날개라도 달린 듯...... 그런데, 당신은 없고 이렇게 높고 외딴 곳에 나만 남겨졌어요. 세상은 나를 향해 일제히 불을 꺼버렸는데, 나 혼자 어떻게 내려가나요?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는데. 내가 한 발도 못 움직일 거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열정이 없을수록 삶은 더 선량해지는데...... 사랑 없이 못 사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걱정하지 마. 당신 생을 내가 살게. 내 생은 당신이 살고. 우리 그러자......"

"이혼이 구체화되면서 그는 갑자기 내부의 매듭들을 하나하나 풀어버리고 있었다. 매듭을 풀 때마다 무숙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문을 하나하나 닫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럴게. 당신이 주는 건 뭐든지 받아들일게. 그럴게......"

부인내실의 철학

"처음엔 몸으로 서로의 선을 느끼고 다음은 서로의 부피를 느끼고 다음엔 서로의 높이를 느끼며 다음엔 서로의 깊이를 느낀다. 사랑해요...... 난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은 내 인생의 가장 마지막 꿈이야. 잡으려면 새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고 뱀처럼 빠져나가버릴 것만 같은 꿈."

"마치 그것을 위해 삶을 다 바친 것 같은 짧은 순간들...... 하지만 바다가 갈라지듯 잠시 생의 조건들이 지워지고 아득하고 덧없는 본질이 삶을 설득할 때. 누가 저항할 수 있나.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을 위해 우리는 산다고, 그래야 한다고, 그게 삶이라고, 그 정도만 바라야 하는것이라고......"

장미십자가

"차차 조금씩 더 먼 곳으로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갔지요. 내가 스스로 그랬어요. 사랑하면서도 내 발로 점점 더 멀리 떠났어요. 사랑한다면서 숨통을 조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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