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재입수한 "내 생에..." 요즘같이 우울함이 절정을 칠 때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이죠. 행복하다는 말을 모른다는 말과 같아."

"이제 보니, 너 웃기는 애구나. 여기선 안 돼. 여기선 안된다는 걸 정말 모르니? 잠을 자든 섹스를 하든, 네 정신 나간 오빠와 여관방에 가서 해."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게 하는 사랑이 박탈된 거야. 넌 단지 부정을 저지른 게 아니라 내 생을 빼앗아 버렸어. 안 돼. 난 이제 절대로 예전처럼 될 수 없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없어. 삶이 참을 수 없이 하찮아. 사람이 왜 허무해지는지 아니? 삶이 하찮기 때문이야. 마음을 누를 극진한 게 없기 때문에..."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화장을 하고 있으니, 마치 내일은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갈 여자처럼 어쩐지 퇴폐적이고 정처없는 기분이 되었다."

"외로운 눈이었다. 내 몸의 가난처럼 그 남자의 가난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그는 마치 나와 그렇게 마주 서기 위해 줄곧 내달려온 외로운 마라톤 선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늘 그렇지만 그런 일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다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일. 그 영혼을 보아버리는 일."

"사람들은 옷을 입은 채로는 바닷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지는 것도 인생이죠."

"침대에 앉아 창 바깥을 내다보는데, 어느 순간 내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것을 느꼈다. 오후 네시였다. 권태가 그만 슬픔으로 변해버리는 시간, 모든 것이 무상하고 남루해지는 이유 없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생은 그 모든 것을 태연하게 꿀꺽 삼킨다. 혼돈과 불안과 죄책감과 두려움과 흔적과 그토록 선명하고 충격적이던 생경한 육체의 감각까지도. 처음에 나는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생의 태연함에, 육체의 포용력에 조용히 경악했다."

"달을 봐. 얼마나 환한지. 저 집채처럼 큰 검은 구름, 미칠 것 같아."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먼먼 곳으로 날라가버렸다. 나도 모르게 당신, 당신, 당신이라고 중얼거리며 열 손가락을 활짝 펴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바람에 날아오른 검은 깃털처럼 공중에 나부끼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 첫날이 언제였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가 나를 죽일 만큼 나에 대한 절대적인 어떤 의미가 남아 있었던가. 우린 서로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아직도 이토록 치명적인가? 사랑을 잃고 무표정하게 살아온 우리의 삶, 이미 서로의 순결이 훼손되어버린 뒤에도 무엇이 남아 있어서 이토록 힘이 드나?"

"괜찮아요? 무수한 발을 가진 기나긴 슬픔이 우리들의 부정한 궤적 위로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나른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렇게도 불행했던가, 괜찮아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토록 따뜻했다니."

"사랑이 그렇듯 삶도 죽음도 참을 수 없도록 남루하고 무상하기만 했다."

"인생의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의 꿈속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상처들은 그와 나를 한동안 더 떠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한밤중 젖은 속눈썹 속에 떠오를 나의 꿈을. 그리고 그의 꿈. 마지막까지 단념하지 못할 하나의 냄새를. 우리들 생애의 마지막 그리움을."

'취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우공양  (0) 2012.02.27
무라카미 하루키 "1Q84"  (0) 2012.01.31
전경린 "물의 정거장"  (0) 2011.12.23
로버트 콩클린 "설득의 심리학"  (0) 2011.12.11
전경린, "엄마의 집"  (0) 2011.11.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