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민망할 수준으로 책 읽기를 멀리하고 있던 나를 다시 책 앞으로 끌어와 주는 그 이름, 전경린.
집 정리를 하다가 아직 읽지 않은 전경린의 책을 발견하고 속으로 내심 기뻤다.
작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서 읽자라고 생각했다가도, 두 번은 읽혀지지 않아 결국 책 선반에 쌓여있기만 한 책들을 보며, 이번 집수리를 기회로 전부 기증하거나 폐품처리 해버릴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책이 나에게 주는 정서적 만족도와 그 만족도의 값어치가 감히 물질적인 것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 많은 책들을 그냥 집에 모셔두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사서 읽기로 했던 내 결심을 유지하는 것도.

전경린의 이번 소설은, 글쎄, 그녀의 다른 소설처럼 확 와닿는다는 느낌은 없다. 386세대의 민주화 운동이 잔여물처럼 부유하는 소설은 사실 이제 힘들다고나 할까. 나는 그 당시에 태어났어도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할 위인도 못될뿐더러 그 전부터 좋아하던 소재도 아니니까. 그래도 단어 단어가 새로운 쓰임새를 갖고 문장으로 만들어질 때 그녀 특유의 오묘함은 여전하다.

"왜 떠나야 하는데? 그게 나의 꿈이니까. 그리고? 그리고, 쉰살쯤 된 어느 날, 어느 나라의 도시에서, 예를 들어 두바이나 카이로 같은 사막 도시에서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여 죽는 거야. 정말 그 따위로 살다가, 그따위로 죽는 거지."

"이젠 보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려보았다.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K가 더 생생하게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그 시절에 대한 혐오와 그리움이 똑같은 밀도로 육박해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좋은가 싫은가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해결이 필요한 내 감정의 과제였다."

"그런 사이사이,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초조한 갈망이 담긴 두 눈이 작은 짐승처럼 절실하게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만 사로잡힌 듯 동요되었다. 동요는 처음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차차 파문처럼 가슴에 동그라미를 그려갔고 점점 더 강하게 소용돌이쳤으며 마침내 나의 몸과 나의 시간과 내 공간을 뒤흔드는 전율로 변해갔다."

"표정 없는 얼굴과 초조한 갈망이 담긴 적요한 두 눈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 거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 속에 안주해서 살수도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찍하게 척박한 곳이고 인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이, 원심분리기같이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 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 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 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