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 저녁에 종종 조카와 산책을 하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졌고, 벚꽃을 핑계로 시작해서 루틴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선선한 저녁에 둘이 산책을 하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뭔가 부끄러워서 평소에는 하지 않을 낭만적인 말들을 조카에게 하고 있다. 꽃비는 사진으로는 못 담으니 눈에다 남겨서 기억해야 해라던가,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한 두명의 나쁜 사람들 때문에 우리 소현이가 조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슬프다 라던가. 한 번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조카는 할아버지는 언제나 옆에 있을거야 했다. 그래서 난 아니, 지금 여기 말고 더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다시 태어나셔서 부모님 사랑 듬뿍 받고, 그 경험으로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진통제 - 요새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다. 자주 먹는 것 아니고 한 달에 한 두 번 먹는 것은 상관 없다고 의사 선생님이 오히려 내게 권했기에 약을 싫어하는 나지만 부담 덜고 먹으려고 한다. 근데 약으로 인해 통증이 덜어지는 순간 찾아 오는 멍함이 있다. 내 눈이 풀리는 느낌. 아빠가 많이 아프셨을 때 병원에서 진통제를 많이 맞고 서서히 눈이 풀려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진통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통증 -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채로 아랫배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 의사선생님조차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한다. 미세하게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엔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파진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진통제에는 계속해서 거부감이 든다. 일반 타이레놀이 잘 들지 않아 그 것보다 성분이 더 농축 된 진통제를 먹으면 위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과 부종,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잠이 따른다. 요새 다른 무엇보다 삶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나인데, 계속해서 이러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 아무것에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삶에의 질긴 애착으로 이 통증을 이겨나가려면 더 건강해지는 것이 답일까 하여 식단과 운동을 그래도 유지해보려고 하는데 식단은 지키기가 어렵지 않지만,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운동은 쉽게 포기하게 된다. 집에서 자꾸 아프니 흐물흐물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일에도 집중하기가 어렵다. 하루이틀이면 사라질 것을 알지만 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섭취하는 약이 나의 다른 부분을 헤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감 - 나에게는 조울증이 있다. 심한 편은 아닌 듯 하고 가끔 울증이 찾아오면 며칠은 걷잡을 수 없이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내가 있다. 항상 밝고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사람이고 싶지만, 이제는 병을 병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을 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될 것 같아서. 운동을 통해 우울증을 많이 극복했고 동시에 조증의 업도 많이 내려와서 감정의 중간선을 비교적 잘 타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또 아랫배 통증이 지속되면서 그 못난이 우울증이 스물스물 발을 들여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에는 이런 순간에 그냥 괴로워서 사라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더 잘 보살펴주고 싶다. 그냥 삶에서 생겨 난 여러 일로 기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는 것이니까. 아팠을 때 왜 아팠는지, 같은 아픔이 계속되지 않게 나를 다독이고 싶은 것이다. 이럴 때 생각보다 일이 도움이 된다. 예전에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했기에 스트레스가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나의 의지로 일을 하기에, 이 일을 잃게 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어떡하나의 고민이 덜어져있기에, 정말 재미로 일을 하게 된다. 몇 시간 집중해서 일을 하고나면 아팠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일로인한 고민으로 가득 찬 내가 있다. 그렇게 종종대다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에서 손을 떼버린채 7시 필라테스 수업을 다녀오면 하루가 알차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 것, 그러면서 남도 몰아세우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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